꿈을 향한 여정: 학창 시절부터 군대 경험을 거쳐 새로운 시작까지

학창시절

저의 학창시절에 대해 이야기를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부유하지 못 환경에서 자라면서,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간식을 즐길 때 종종 그저 바라만 보거나 가끔 한입만 얻어먹곤 했습니다. 그 당시 돈을 찾기 위해 철봉 밑 모래사장을 파기도 했고, 운이 좋으면 100원이나 500원을 주워 학교 앞에서 만두를 사 먹곤 했죠.

중학교 때는 참 말썽꾸러기였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공부에 열중할 때, 저는 밖에서 뛰어다니며 벨을 누르고 도망치는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주말마다 PC방에 가서 친구들과 게임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죠. 성적은 그저 그랬고, 고등학교를 올라가야 할 때 인문계와 기계공고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결국 부모님의 반대로 인문계에 진학했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반에서 거의 꼴찌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쁜 선생을 만났습니다. 한 번은 등교가 늦었다고 손지검까지 당했죠.

3학년 때는 화학을 전공 담임 선생님을 만났지만, 저는 여전히 지구과학에 더 흥미를 느꼈습니다. 학교에서 지구과학 심화 과목은 가르치지 않았지만, 저는 혼자서 공부하며 전국 모의고사시험을 보면 항상 전국 10% 안에드는 높은성적을 받았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제가 화학에도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셨지만, 저의 지구과학에 대한 열정을 보고 뿌듯해하셨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반에서 꼴찌를 하던 저는, 3학년 때는 반에서 15등 안에 들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수능에서는 역시 지구과학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다른 과목들은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제가 원하던 지질학과에 갈 수 없게 되자, 부모님의 권유로 실내건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처음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해 학점이 낮았지만, 두 번째 학기에는 조금 더 노력하여 성적을 개선했습니다.

이후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고, 그 경험이 제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군대

10년이 지난 지금도, 군대에 입대한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너무 생생합니다. 이모와 어머니가 같이 마중나와 보충소 앞에서 마지막으로 부대찌개를 먹고, 콜라를 원샷하고 긴장과 두려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저는 306 보충소로 입대했습니다.

제가 배정받은 곳은 바로 악명 높은 백골부대였습니다. 생활관 동료들은 백골이라는 경례를 하며, 앞으로 힘들 것이라고 반 놀림 반 진심으로 인사했습니다. 강원도 철원의 최전방 백골부대로 가는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해골 표지판들은 정말로 살벌했습니다.

백골부대 훈련소에서는 힘든 기초 훈련을 받았습니다. 처음으로 총을 쏴보고, 3km 달리기를 하고, 눈이 오는 가운데 텐트를 치며 야영도 했습니다. 저는 어려운 청소년 시절을 보낸 탓에 생존 본능이 몸에 배어있었나 봅니다. 훈련교관이 아무리 힘들게 굴려도, 저는 더 독하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이왕 힘든곳에 온 거 끝까지 가자. 더 독하게 해서 백골부대 수색대대에 들어가자.’

훈련병으로서의 생활 동안, 제 첫 3km 달리기 기록은 평범한 18분이었습니다. 하지만 훈련병 생활이 끝날 무렵, 기록은 놀랍게도 12분 30초로 단축되었습니다. 이는 특급 체력의 기준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죠. 훈련이 끝나갈 즈음, 각 부대에서 찾아오는 간부들 중 한 조교간부가 저를 조교로 선발하려 했습니다. 그는 제 눈빛이 마음에 든다며 조교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확고한 마음으로 “저는 수색대대에 들어가고 싶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그 조교는 웃으며 “거기 가면 후회할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저는 결심이 확고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실제로 수색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수색대대에서는 체력이 특급이 아니라면 사람취급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등병 때부터 12분 30초의 달리기 기록과 18발 사격의 특급전사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능력 덕분에 다른 동기들보다 빨리 진급했습니다.

DMZ 작전에 투입되기 전까지, 저는 많은 추가 훈련을 받았고 여러 총기를 다뤘습니다. 수색 작전을 위해서는 낮에는 팀 전술훈련과 사격, 밤에는 야간투시경을 장착하고 매복 작전을 위한 야간 사격 훈련을 했습니다.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사격 훈련을 진행했죠 (그래서 지금 이명이…).

수색대대의 일과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일과 시간이 끝났다고 해서 휴식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작전이 있으면 언제든지 임무에 투입되어야 했으며, 일과 후에도 체력 단련은 계속되었습니다. 군장을 메고 산악 구보를 하는 동안 새로 들어온 신병들 중에는 토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 당시 조교가 “거기 가면 후회할텐데”라고 말한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수색대대에서의 힘든 군 생활 속에서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가장 중요한 교훈은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제가 스스로 만든 한계와 편안함을 벗어나는 방법을 배웠죠. 수색대대에서는 말년이라고 해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작전에서는 계급이 높다고 해서 예외가 없었습니다. 특히 작전에서 선임분대장의 역할은 막중했습니다. 팀원들을 올바르게 이끌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 될 수 있기때문입니다. 전역할 때쯤, 저의 3km 달리기 기록은 놀랍게도 10분 30초까지 개선되었습니다.

군대에서 얻은 또 하나의 습관은 책 읽기입니다. ‘멈추지마 꿈부터 다시 써봐’라는 김수영 작가님의 책을 우연히 발견했고, 그 책은 제 인생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군대 안에서 처음으로 해외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전역 후: 새로운 도전과 꿈을 향한 여정

군대에서 품었던 해외 여행의 꿈을 전역 후에 실현하게 되었습니다. 문화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유럽을 여행하면서, 제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었습니다. 이 여행은 저에게 과거를 떠나 독일 유학이라는 새로운 모험에 도전할 용기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언어 장벽, 그리고 제 능력에 대한 의문들이 저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독일 유학을 준비하는 도중,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이때, 하야마 아마리씨의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라는 책을 읽고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1년 동안 최선을 다해보자’는 결심을 하고, 이 꿈을 주변 사람들에게 공유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네가?”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그들의 반응이 이해가 갔습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는 것은 쉽지 않으니까요.

의심스러운 반응에도 불구하고, 남은 기간 동안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를 통해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점차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은 학교 생활을 최선을 다해 마치며, 독일어 공부에도 몰두했습니다. 또한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제 공부 방식은 간단하지만 효과적이었습니다. 반복과 지속을 통해, 뇌가 이해할 때까지 계속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나 자신과의 싸움과 같았습니다. 결국, 책 한 권을 통째로 머릿속에 넣었고, 그 결과로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 공인자격증인 실내건축 산업기사 자격증도 취득하는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노력의 결과,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으로부터 초기 정착지원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필요한 자금을 조금씩 모아 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독일에 사시는 한 고객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은 제 독일행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분의 도움으로 저는 꿈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독일로 향하는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습니다. 이는 제가 꿈꿔온 변화의 시작이자, 새로운 모험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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